표현과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는 함부로 확대해선 안돼
노란봉투법 취지에 반하는 입법이 될 것
언론 위축시키지 않으려면 일반적 징벌손배제 도입 선행되어야
더불어민주당은 ‘허위조작정보’라는 기존에 없었던 불법정보의 범주를 만들어 이를 단속하겠다고 허위조작정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추진하고 있다. 사단법인 오픈넷은 이미 지난 2022년 문재인 정부 시절 비슷한 법안에 반대하여 국제인권기구 및 단체들과 힘을 합해 통과를 저지한 바 있으며 이번 입법 역시 단호히 반대한다.
첫째, 우리나라에는 일반적 징벌손배제도가 없다. 즉 ‘나쁜 행위’에 대해서는 징벌손배가 부과되지 않는데 ‘나쁜 비판’에 대해서는 징벌손배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은행이 금융상품을 악의적으로 판매해도 징벌손배가 적용되지 않지만 그런 은행을 비판하려는 언론은 잘못 보도하면 징벌적 손배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언론의 비판과 감시라는 사회적 기능을 크게 위축시킬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징벌손배를 ‘언론에만 한정하지 말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민사손배제도가 인정하는 손해배상액수가 비현실적으로 낮다. 잘못된 정보나 표현에 의해 발생된 손해뿐만 아니라 물건이나 행위의 흠결로 발생한 피해도 손해배상액수를 늘려야 한다. 언론/정보/표현만 겨냥해서 손해배상액수를 높여 공론의 장을 위축시킬 것이 아니라면 ‘일반적 징벌손배제’부터 실시해야 할 것이다.
둘째, 명제가 허위라고 해서 민사든 형사든 법적 책임을 지우려 해서는 안 된다. 이미 2010년 미네르바 사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형사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결정했다. 특정한 해악을 발생시키지 않아도 막연히 ‘허위’를 처벌하는 것은 불명확하다는 이유였다. 국제인권기구들도 여러번 허위사실유포죄는 인권침해가 명백하다고 천명했고 이미 박정희 유신시대의 긴급조치 1호 ‘유언비어유포죄’만 보더라도 우리는 폭넓은 남용가능성에 대해 충분한 학습이 되어 있다.
이번 법안의 추종자들은 유언비어유포죄와 달리 이번 법개정은 ‘해악을 발생시키는 허위만 겨냥한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인정될 수 있는 표현과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는 이미 관련 법리가 확립되어 있다. 막연히 ‘허위조작정보의 피해에 대해 손배청구를 할 수 있다’는 법 조항이 생긴다면 명예훼손, 사기 등의 구체적 해악의 입증 없이도 누구나 손배청구를 하려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2008년 PD수첩 광우병 보도에 대해 당시 검찰은 ‘미국산 소를 높게 평가한 농림수산부장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억지를 부려 명예훼손 책임을 PD들에게 지우려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허위조작정보 손배 조항 하에서는 그런 억지를 부리지 않고도 PD들에게 폭넓은 민사책임을 지울 수 있다. PD수첩의 허위보도를 믿고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왔으므로 광우병 시위진압 및 교통억제비용도 청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집회시위가 있을 때마다 집회시위의 대상이 되는 기업, 기관, 개인은 시위장소에 나타나 발언자들의 발언을 꼼꼼히 기록했다가 조금이라도 허위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집회시위 때문에 매출감소, 행정비용, 위자료 등이 발생했다면서 허위조작정보 손배소를 제기할 수 있다. 만일 이재명 대통령 포함 정치인들이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 재판을 받다가 단돈 10만원이라도 벌금형 유죄가 나오면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의 허위발언 때문에 투표를 잘못했다며 집단적으로 위자료를 청구할 수도 있다. 현재까지 표현과 행위 사이에 인정되어 왔던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기발한 손배소송들이 난무할 것이다.
노란봉투법이 왜 필요했는가. 사용자들이 소위 ‘불법파업’ 때문에 발생한 매출저하 등에 대한 책임을 노동조합이나 개별 노동자에게 지우는 행태를 막기 위한 법이다. 하지만 허위조작정보 손배제 하에서라면 사용자들은 너무나도 용이하게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게 경영상 책임을 물을 것이다. 노란봉투법은 파업(엄밀하게는 사용자의 불법행위에 대응하는 ‘정당한 파업’) 때문에 발생한 피해청구를 못하게 되어있으나, 다른 요인으로 발생한 피해청구까지는 막지 못한다. 사용자들은 노동조합의 문건이나 노조지도자들의 발언에서 소위 ‘허위조작정보’를 찾아내 노조원들이 이 허위조작정보 때문에 오도되어 업무거부를 하는 것이라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다.
국가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원주의 사회의 헌법은 다양한 믿음과 세계관을 가지고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쓰여져 있다. 과연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믿음 때문에 계엄이 일어난 것인가?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세력이 ‘부정선거론’을 핑계로 준동했다는 것이 민주당의 주장 아니었는가? 결국 다른 사람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누를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계엄의 원인 아니었는가. 계엄이 가짜뉴스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터넷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계엄을 막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15년 전 미네르바에게 적용되었던 전기통신기본법 ‘허위사실유포죄’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면 국민들은 처벌이 두려워 ‘국회로 가자’는 운동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인도네시아에서는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정부가 시위 관련 영상을 허위조작정보로 규정하며 영상유포자들을 처벌하고 있다.
2025년 9월 29일
사단법인 오픈넷
[관련 글]
56개 국제시민단체, 국회의원 비위에 대한 저항시위에 ‘허위조작선동’으로 형사처벌한 인도네시아 정부 규탄 (2025.09.11.)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규정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정청래 의원안, 2200058)에 대한 반대의견 제출 (2024.06.20.)
네티즌과 인터넷 공론장도 개혁 대상? 위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 논의 (2021.11.18.)
휴먼라이츠워치, 대통령 및 국회의원 전원에 언론중재법 개정안 철회 의견 서한 발송 (2021.09.16.)
UN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정부에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 표명하는 공식 통신문 전달 (2021.09.01.)
국제인권기구 아티클19, 한국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철회 촉구 (2021.08.25.)
0 Comments